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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에 사는 HIV/AIDS

알 수 없는 사용자 2014. 6. 11. 14:06




 네, 우리에겐 간디의 나라 혹은 타지마할의 나라로 더 친숙한 곳.. 바로 "인도"입니다. 그리고 제가 지내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저는 써빙프렌즈 파견 단원으로 인도에서 HIV/AIDS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어요. 제가 사는 곳에는 HIV 보균자들과 AIDS 상태로 사는 사람들(이하 PLWA: People Living With AIDS)이 사회 곳곳에 꽤 많아요. 작은 동네 곳곳에 순박한 사람들의 몸 속에서 HIV/AIDS가 살고 있는 나라가 인도입니다. 저는 여기서 현지인 직원들과 함께 환자 가정을 찾아가 만나고, 그들의 신체적·사회적·경제적 어려움을 살피고 도우며 살고 있어요.

 뜬금없이 제 신상을 밝히는 것은 오늘 여러분께 보여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실제로 그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이기 때문입니다. HIV/AIDS로 인해 면역력이 없어 몸이 힘든 것도, 마을 사람들은 물론 가족에게까지 등 떠밀리고 소외 당하는 것도, 환자 대다수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다시피 하는 경제적 어려움에 있는 것도, 그 외에도 크고 작은 어려움 아래 있는 것도 모두 똑똑히 보고 살면서 이 실상을 전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래에 계속될 이야기들은 모두, 실제로 지금 이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이야기입니다.

비록 멀리 이국의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원칙적으로 HIV/AIDS의 특성상 신상 정보를 드러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모든 이름은 익명 처리하였고 실제 PLWA의 사진도 공개하지 않음을 양해 부탁 드려요. 또 게시된 모든 사진은 등장인물과 전혀 무관합니다.





 제가 인도에서 처음, 아니 난생 처음 만나본 PLWA는 과부 B입니다. 당시 저는 써빙프렌즈에서 매년 겨울 파견하는 대학생 봉사활동 “Love In Action” 팀으로 인도에 온 학생이었어요. HIV/AIDS에 대해서 단편적인 지식들밖에 갖고 있지 않은 상태였고, 그나마도 제 머릿속에서 연결되지 않은 채 둥둥 떠다니고 있을 뿐이어서 솔직히 B를 만나러 가는 길이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습니다.

 도착해서 마주한 B의 집은 말이 좋아 집이지, 그 집을 사진 찍어 흑백 처리만 하면 ‘전쟁통 피난민들이 임시 거처로 지은 움막집’이라는 설명을 달고 근현대사 교과서에 실어도 될 만한 곳이었어요. 

 집 한 채가 있고 그 집 마당에 공동 화장실과 함께 움막집이 여러 개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 ‘흔한 집 한 채’가 움막집들을 세 놓은 집주인 집이었습니다. 저희가 찾아간 과부는 그곳에서 월세 900루피(한화로 약 18,000원)였나 하는 돈을 내며 살고 있었어요. 허리를 구부려야만 들어갈 수 있는 집 안에는 한 켠에 거적떼기 같은 잠자리, 다른 한 켠에 씻어서 얼기설기 쌓아 둔 부엌살림들이 옹색하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생쥐처럼 자그만 몸을 감싼 붉은색 사리(인도 전통 의상)만큼이나 밝은 얼굴을 하고 우리를 맞아 준 과부는 덤덤하게 자기 인생 얘기를 들려주었어요. 

 '더 이상 무엇도 바라지 않는다'며 웃던 그 과부의 얼굴이 어두워진 건 한 순간, 7년 정도 이어진 결혼 생활을 ‘hell’이라고 표현할 때뿐이었습니다. 남편은 과부의 몸에 에이즈라는 흔적을 남긴 채 먼저 죽었고 과부는 그렇게 혼자 삶을 꾸려가고 있어요.

 한 무더기의 외국인이 과부를 찾아온 것이 신기했는지 이웃들이 연신 우리를 흘낏거렸고, 덩치가 작은 과부보다도 머리 하나쯤 작은, 정말 작은 집 주인 여자도 환한 얼굴로 우리를 맞아 주었지만 우리가 갈 때쯤 자꾸 과부를 떠밀며 뭐라뭐라 이야기를 했습니다. 무슨 말이냐고 현지인에게 물어보니 ‘이 여자를 데리고 가라’는 말이었어요. 때리다시피 떠다미는 우악스러운 손길 아래서도 과부는 그저 웃으며 우리에게 손을 흔들 뿐이었습니다.

 파견 단원으로 다시 왔을 때 만난 B는 여전히 연고자도 없고 힘도 없는 삶을 부지런히 이어가고 있었어요. 그냥 거기 사는 자체로 불안해 보였던 집에서도 나와서, 단칸방이나마 이사를 했고 한 병원에서 청소와 차 준비 등 잡일을 하며 작은 수입이지만 착실하게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답니다.




 또 다른 가족을 소개하고 싶은데요. 남편 S와 부인 G는 둘 다 AIDS가 상당 진행된 상태로, 서로 의지하며 오순도순 살고 있는 가족입니다. 아이는 애초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부부가 처음부터 둘 뿐이었던 건 아니에요. 형제 자매들은 HIV를 이유로 이들과 연락을 단절한 지 오랩니다. 그나마 양쪽의 어머니들만이 한번씩 오가며 일을 보아 주고 있어요. 

 G는 AIDS 관련 클리닉에서 잡일을 돕는 도우미로 출근을 하다가 클리닉이 위치를 옮기면서 졸지에 실직을 했고, S는 HIV 때문에 시력도 잃고 하반신이 마비에 가까운 상태라 침대에 앉아서 하루를 보냅니다. 수입이 없어 때로는 쌀이 떨어지기까지 하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G는 얼마 전부터 학점 은행 제도로 끊겼던 공부를 이어가기 시작했어요.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여성 인권이 쉽지 않은 나라인 인도에서, 풍족하지도 건강하지도 않은 G가 공부를 시작할 수 있던 건 순전히 남편 S의 지지와 응원 덕분입니다. 

 아무리 봐도 금슬이 좋은 S와 G 부부를 보며 저는 같이 일하는 현지인 직원에게 S와 G가 HIV 감염된 이유를 조심스럽게 물어보았어요. S는 한때 운전 기사였고, 대여한 차가 아닌 자기 차로 일을 했기 때문에 수입이 꽤 짭짤했다고 해요. 보통 아프리카나 인도의 운전 기사들은 넓은 땅을 오가며 물건을 날라야 하기 때문에, 장거리일 경우 하루 안에 집에 들어오기가 힘들어요. 그 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윤락가를 들락거리며 HIV 감염의 ‘고위험군’으로 분류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S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어요. S가 HIV에 감염된 건 어떤 심각한 교통사고 후, 제대로 된 병원이 아닌 시골 구석의 ‘메디컬 홀’이라고 써 있는 불법 의료업소에서 수혈을 잘못 받았기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어요. 지저분한 시멘트 벽에 ‘메디컬 홀’이라고 써있고 적십자도 그려져 있지만, 겉에서 봐서는 아무리 봐도 의료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며 차라리 폐가라면 믿을 것 같은 곳을 길거리에서 몇 번 본 적이 있는데 바로 그런 곳이 문제였던 거예요. 빈번한 주사기 재사용, 정확한 검사를 거치지 않은 수혈… S는 그렇게 HIV에 감염되었습니다. 그 당시엔 그런지도 몰랐지만요.

 이상하게 자꾸 아픈 몸, 자꾸 약해지는 느낌을 받으며 찾아간 병원에서 의사들은 이런저런 검사를 들이대고 이유 없는 입원을 시켰습니다. HIV 창궐 지역인 인도에서, 의사가 몰라서 혈액 검사를 제외한 다른 검사와 입원으로 소위 '뺑뺑이'(?)를 돌렸을 리는 없을 거예요. 그렇게 보호받지 못하고 재산을 탈탈 털리는 과정에서 S는 시력을 잃고 하반신 마비 증세까지 생겼습니다. 

 지금 S의 다리는 꼭 마른 나무 같이 보이는데, 누가 만져도 느껴지지 않고 힘껏 꼬집으면 조금 느낌이 드는 정도예요. 거동조차도 어려운 상황이지만 S의 집을 찾아갈 때면 언제나 깨끗하게 정돈된 침대 위에 말끔한 차림으로 앉아서 맞아 줍니다. 비록 눈은 허공을 보고 있지만 물처럼 깊고 담담한 목소리는 사람을 알아보고 반가워하여, S가 속속들이 다정한 사람임을 알 수 있어요.




       이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이야기를 안고 살아가고 있어요. 


 가족들에게 짐짝 취급만 받다가 세상을 떠난 과부 D,
 과부 D가 세상을 뜨기 무섭게 그 딸들을 공장이나 남의 집 부엌데기로 취직시켜 착취한 친척들(지금은 그 아이들과 더 이상 연락할 방법이 없어 어떻게 사는지 모릅니다), 남편 때문에 HIV에 감염됐지만 남편이 병을 구실 삼아 아내와 딸을 버리고 아들만 데리고 떠나 혼자 딸을 키우고 있는 과부 Y, 마을에서 공동체에서 쫓겨나 이리저리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는 과부 S, 삼촌과 오빠들 등 남자 가족들이 돈을 벌기 위해 끌어내어 창녀로 만들어 HIV에 감염된, “우리가 이렇게 하고 싶어서 이렇게 된 게 아닌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라고 외치며 현지인 직원을 찾아와 무너지듯 엉엉 울던 여자들…

 또 AIDS 클리닉에 앉아 있다 보면 보게 되는 때로는 퇴폐적이고 때로는 절망적인 수많은 여자들의 얼굴…
그들의 얼굴을 마주하며, 이런 이야기들을 듣다보면 가끔 제 안에 아우성처럼 질문이 올라오곤 합니다. 


"이 엄청난 고통 앞에 내가 하는 자그만 일들이 의미가 있긴 한 것일까?" 




 그러나 이들을 만나고 이야기할 때마다 귀한 손님 대접하듯 맞아주는 이들을 보며,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인의 손을 맞잡고 네가 내 딸이라고 이야기하고 볼을 부비고 안아주고 입을 맞추는 이들을 보며 다시 또 깨닫습니다. 대단한 것 하지 않아도 우리가 이렇게 함께 먹고 웃고 지내는 것 자체로 이들의 세계에서는 색깔이 변한다는 것을요. 비록 요술 지팡이 같은 해법은 주지 못하지만, 드리워진 깊은 절망을 어쩌질 못하고 그저 아파하는 것만으로도 서로 이해와 사랑이 싹틀 수 있다는 것을요.

그래서 함께해 주시는 써빙프렌즈의 수많은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 

앞으로도 이곳에 희망이 심기도록 사랑의 시선으로 함께 지켜봐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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